민주주의는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같은 녀석이었다.
미국 흑인 폭동사태를 직시하며, 민주주의가 필자의 기분을 현재 썩은 고인 물 냄새만 실컷 맡고 있는 더러운 기분을 들게 한다. 그래서 필자는 먼저 멘션([mention]을 한다. 인간과 바이러스의 차이점은 인간과 달리 바이러스는 절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평범한 진리가 있다. 미국의 민주주의는 바이러스보다 못하단 말인가. 미국에서 백인경찰관이 흑인을 무릎으로 짓눌러 사망하게 만든 사건이 흑인폭동 사태로 번지고 말았다. 이 폭동은 미국의 인종차별 개혁을 앞당기는 신호탄이 될 것이다.
정말 너무 두렵고 무섭다. 이게 과연 민주주의인가? 이게 민주주의의 원초라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생긴 일이다. 이것은 후진국의 전형이다. 미국은 차별하나 만큼은 선진국이 절대 아니다.
그런데 왜 미국 전역에 폭동이 일어난 걸까?
미국은 대한민국 지역주의에 비해 비교도 안될 만큼 흑인과 백인지역으로 엄연히 나눠져 있으며, 백인 지역에 흑인이 들어오면 의심을 받아 아무나 그를 쏴 죽여도 너무 당연한 일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흑인들은 백인동네를 무사히 다닐 수 있는 미국사회를 원하기에 폭동사태가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이다. 단지, 백인 경찰이 흑인을 죽여서가 아니다.
필자는 여기서 정의를 한 가지 하겠는데, 그것은 훼손되지 말아야 할 건 피해자 인권이지 피해자 인권운동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필자가 작금의 미국 폭동사태를 바라보며, 느낀 것은 특권에는 반드시 만행이 있는 법이라는 것이다. 미국에는 수사공무원의 면책권이 도사리고 있다. 선의로 인권을 침해한 공무원은 책임이 없다. 이것이 특권이며, 천박하고 무식한 만행이다.
대한민국 민주주의에게 우리는 감사하고 있는가? 이 물음에 대하여 아래의 내용을 심도 있게 읽기 바란다.
여기서 민주주의를 사전적 의미(국민이 권력을 가짐과 동시에 스스로 권리를 행사하는 정치 형태)가 아닌 필자가 나름대로 재정립하고자 한다. 그것은 [국민들이 아무 것도 모른다고 무시하지 말고, 모르면 알려주고 설명해주는 것]이다.
미국은 대한민국과 달리 근로자를 해고하기 쉬운 나라인데, 이걸 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건 민주주의가 아니다. 예를 들면 폭스바겐의 무차별한 인종차별 인스타 광고를 보면 무슨 뜻인지 잘 알 수 있다. 흑인을 내치는 거대한 백인 손과 일베 손 모양에 필적하는 화이트파워를 상징하는 네오나치의 손 모양, [니거]를 떠올리는 글씨-내쳐진 레스토랑 이름[petit colon] 즉, 작은 식민지를 뜻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쉬운 해고 방식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차별이라는 것이다.
제국주의에 매몰된 미국과 일본은 반드시 경계를 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군, 경찰, 검찰, 사법, 정보기관을 동원해 민주주의를 외치는 국민들을 탄압하고 무소불위 절대 권력을 행사하다가는 국민들에게 매타작을 당할 수 있다.
시위하는 국민을 대하는 트럼프를 보며, 민주주의란 얼마나 박살나기 쉬운 재질과 같은 유리인지 새삼 느끼게 된다. 국민들이 지키고 있어 단단할 것 같지만, 권력을 거머쥔 지도자 한명에게도 깨질 수 있는 아주 미약한 제도가 민주주의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이런 폭동으로 인해 민주주의의 정당성이 사라졌다고 믿는다면, 그야말로 폭동의 중심에 있는 권력자들이 바라던 대로 되는 것이다. 권력자가 만든 선량한 백성과 폭동의 양분 프레임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이 있다면 이러한 폭동 프레임을 대한민국 국민들은 거부해야 한다.
태어나자마자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향유하는 것이 가능했던 세대들은 기성세대에게 빚을 지고 있는 느낌 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역사에 반하는 행동과 이야기는 안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필자는 미국의 폭동 사태를 보며 새삼 깨닫고 있는 것이 있다. [민주주의는 곰인 줄 알았더니 여우같은 녀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