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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필가 김세영) 가족이란 뜨거웠을 땐 달콤하지만, 식어버리면 쓰게 느껴지는 커피와 같다.

김세영 평론가 2021. 4. 5. 16:40

 

 

김세영 대학강사 / 문필가 / 전직 대학교 연구원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는 사람을 예스럽게 한문투로 유명인(有名人)이라고 한다. 유명인(有名人)으로 산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을 매사에 지나치게 의심하는 호의(狐疑)를 양방향으로 가지고 있으며, 대중들은 이들을 비약적(飛躍的)으로 확대시킨다. 그렇기에 유명인(有名人)들은 어떤 때에는 대중들에게 심하게 욕을 하거나 꾸짖음을 당하고, 어떤 때에는 아무 의미가 없는데도 정도 이상으로 치켜세워 진다.

 

가족이 살고 있는 사회의 세상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넓기도 하지만, 동시에 각자 자신의 발로 걸어서 돌아볼 수 있을 만큼 좁은 세상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사회의 세상에는 가족에게 끊임없이 회귀(回歸)하려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가족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울부짖는 사람도 있다. 가족을 양쪽으로 갈라 구분 짓는 기준(基準)은 대부분의 경우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인데, 이것은 가족에 대한 마음속에 품은 여러 가지 상념(想念)의 비중(比重)과는 약간 다른 것이다.

 

누구나 경험상, 가족의 상념(想念)이란 맞을 때도 있고, 맞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러니 일일이 신경 써봐야 자신에게 득이 될 게 없다. 그래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착실하게 해나가면 권선징악(勸善懲惡)이나 재앙(災殃)이 생기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이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미지(未知)의 섬이 아니다. 어떠한 일에도 반드시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있고, 권선징악(勸善懲惡)은 꼭 모두 같은 형태라고 할 수 없다. 가족에게도 권선징악(勸善懲惡)은 통하고, 부모나 자식, 형제 관계에서도 반드시 권선징악(勸善懲惡)은 있다. 죽은 자는 절대 배반하지 않으며 반드시 반격한다. 그 반격은 재앙(災殃)으로, 재앙(災殃)을 불러일으킨 당사자(當事者)와 본인(本人)의 자식(子息), 그 자식이 낳은 자식(子息)에게 반드시 돌아온다. 그래서 죽은 자는 그저 완전하게 죽은 상태로 있는 것이 아니다.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실체란, 뜻하지 않은 불행한 변고인 재앙(災殃)이다. 재앙(災殃), 이것은 바로 내게 닥쳐오지 않는 한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가족이라는 서랍 속에 어감이 큰 반듯하게 개켜진 드라마 왜 그래 풍상씨는 주인공 풍상이 를 통해 부모가 없는 형제에게는 똑바른 큰 형이나, 큰 오빠, 큰 누나가 부모와 같다는 교훈을 대한민국 사회에 인생의 초점 의미를 전해준 드라마 였다. ‘풍상이 같은 오빠’ ‘ 누나가 있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작지만 먼지로 절대 변하지 않는 행복'이 아닐까 하고 필자는 생각한다.

 

가족은 기본적으로 불공평한 사회인 것이다. 가족이라는 사회는 때때로 이랬다저랬다 잘 변하는 변덕(變德)이 가득한 불공평한 사회이며, 어떤 경우에는 잔혹한 세상이기도 하다. 가족이라는 사회와 세상은 나이를 먹어 보면 본인(本人)이 몹시도 긴장된 새싹이 돋는 아기시절과 스무 살 안팎의 젊은 청춘 시절을 보낸 듯한 기분이 드는 사회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니고, 전부 바보 같은 상념(想念)만 하면서 구질구질 살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제일 나쁜 인간을 정의하자면, 살인마와 성폭행범을 제외하고는 가족이 가족에게 금전적인 사기(詐欺)를 치는 인간과 사돈이 사돈에게 사기(詐欺)치는 인간이며, 이보다 더 잔혹한 인간이란, 드라마 펜트하우스처럼 자신의 이익을 취하기 위하여 나쁜 꾀로 부모님을 돌아가시게 만드는 인간이라고 정의한다. 이들은 자신을 포함하여 자신의 직계 가족들이 모두 오늘과 내일 또는 언젠가는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징계를 재앙(災殃)을 통해 죄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작금의 대한민국 가족 사회는 대중들에게 모범적인 이미지를 선사해 준 유명인(有名人)과 뉴스 매체 속의 범죄를 통해 다시 태어나서 자신의 현재 가족과 처음부터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다시 그들과 시작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농담하세요’ ‘그 무서운 짓을요.’ '아뇨, 싫어요.'라고 대답할 것 같은 뉘앙스(nuance)를 풍기는 사회의 단면(斷面)을 보여주고 있다.

 

필자의 소견(所見)을 늘어놓자면, 이글의 의미는 좋은 가족은 얼마든지 있지만, 좋은 가족을 불쑥 찾는다고 해서 쉽사리 찾아지는 것이 아니므로, 필자의 글을 읽어두면 의외로 가족으로 인한 고통의 진통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가족에 의한 고통의 진통제는 사법부도 처벌할 수 없는 단죄(斷罪) ,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징계(懲戒)인 재앙(災殃)이 있으므로 만약 가족으로 인한 고통으로 울부짖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들에게 이글을 바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