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추행’이라는 단어를 양 끝을 오려내어 동그랗게 만든 다음, 우아한 국어사전 페이지에 끼워 넣어 은근 멋있는 단어로 만들어 보자.

2021. 1. 29. 16:18카테고리 없음

김세영 대학강사 / 문필가 / 전직 대학교 연구원

 

 

필자는 글을 쓸 때 세련되고 아름다움의 멋을 부리지 말라는 충고를 들을 때마다 심오하고 미묘해진다. 글 멋부린다는 말을 댓글로 듣는 이유는 어떤 주제나 문장 등에 대한 독자들의 반응을 보고 나에게 조정을 가하는 feedback을 반복적으로 들어서인 것 같다.’ 어떤 열혈 독자가 내 글에 대해 했던 그 댓글이 지금까지도 내 몸 어딘가에 새겨진 것처럼 마음에 자극을 받아 따가운 느낌처럼 뜨끔거린다. 하지만, 이번 글의 주제인 성추행에 대해서는 이 단어 자체가 멋은커녕 흉악망측(凶惡罔測)’하기 때문에 순화(純化)하기 위해 멋을 부리면서 써야 할 것 같다.

 

예절과 의리자체에도 남, (男女)에게는 늘 치를 떠는 강간 따위를 하거나 성희롱을 하는 짓인 성추행(性醜行)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이 단어에는 악기(惡氣)와 악심(惡心)이라는 고의가 담겨있다. 예의에 벗어난 무례(無禮)라고 포장되는 성추행인 경우엔 온몸이 분노로 뒤덮인다. 성추행이 폭력인 줄 모르는 것도 문제이고, 성폭력을 아무렇게나 규정하는 것도 문제이며, 상냥함의 표시가 겉쪽의 치레가 아닌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청춘들은 평생 모를 것이다.

 

예절과 의리자체에도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는 알맞은 섭씨(攝氏)와 화씨(華氏)의 위로와 포옹을 건네오는 온도가 필요하다. ‘예절과 의리에는 상대방에게 표현하기 어려웠던 언어와 더욱 사무치게 고마운 마음이 내포되어 있다. 나의 말을 들어주는 이에게는 고마워하는 마음과 나의 이기심에서 연유된 수많은 감정 개입을 이해해 주는 이에게 그저 고맙기만 하기에 누구나 행동으로 표현을 한다. 여기서 성추행이라는 오해의 함정에 빠지게 될 수가 있다.

 

그럼 성추행이라는 오해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주었던 동료 의식(同僚意識)을 돌려받겠다는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동료 의식(同僚意識)을 돌려받겠다고 행동하면 내 마음과 상대방과의 관계도 불편해진다.

 

반대로 일면식도 없는 존재한테는 꾀를 부려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똑똑한 도구인 스마트폰이 최고의 회피(回避)가 되고 있는데, 필자는 스마트폰이 거울 같다는 생각을 한다. 스마트폰을 본다는 것이 나 자신을 보기보다는 스마트폰이라는 거울을 통해 타인을 더 많이 보게 되는 것이니, 이렇게 생각하면 남성들은 성추행이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늘 거울과 마주하고 있다는 생각을 입는다.

 

성추행은 해를 입은 피해자(被害者)들과 연대(連帶者)자들을 기억하고 있다. ‘성추행이 이번 정권부터 유독 단죄를 강행하는 이유는 사법 시스템이 기간 또는 시간과 관계없이 피해자에게 선택지로서 제대로 기능하려는 노력 덕분이라고 필자는 느낀다.

 

남성들은 지금까지 충분히 예절과 의리를 표현하기에 앞서 성추행이라는 오해의 함정에 빠질까 봐 지나치게 괴로워했다. 남성들은 정말 이제는 숨을 쉬고 싶다. ‘성추행이라는 단어 때문에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쳤다. ‘성추행이라는 단어는 남성들을 많이 아프게 한다.

 

좋은 향기가 나는 향수를 손에 뿌린 후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러면 책 페이지마다 은은한 향기가 배어서 책이 우아해진다. 앞으로 성추행이라는 단어를 양 끝을 오려내어서 동그랗게 만든 다음 예절과 의리라는 단어가 포함된 우아한 국어사전 페이지에 끼워넣자. 그래서 흉악망측(凶惡罔測)’한 단어에서 은근 멋있는 단어로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