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2. 9. 16:50ㆍ카테고리 없음
매운맛이나 독한 냄새 등으로 혀끝이나 콧속이 알알하게 퍼지는 매운맛을 느끼고 싶다면 콜라나 사이다 한 컵을 마시고 난 뒤 트림할 때 알 수 있다. 이것이 필자가 쓰는 알싸한 평론 글이다.
필자는 인간을 숙주(宿主)로 삼는 복면가왕과 같은 ‘층간소음’에 대하여 글을 쓰되 알싸하게 쓰려 한다. 복면가왕이라는 음악프로에는 되게 매력적인 보컬들이 많이 등장한다.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고 노래를 부르니까 가면을 벗고 난 후 믿어왔던 것이 송두리째 뒤집히는 순간을 느끼게 된다.
아래 윗 층에 사는 이웃에겐 마음속에 떠오르는 못된 이미지보다 우스운 이미지가 더 마이너스지만 우스운 이미지보단 한심한 이미지가 덧씌워지는 것이 어중이 떠중이 들의 기본 소양이 된다.
‘층간소음’은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을 숙주(宿主)로 삼는 ‘기생충’이다. ‘기생충’은 그 자신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스스로 이웃에게 알려주는 돌연변이가 되기로 결정한 순간에 말과 동작을 기록하는 기주(記注)가 된다. 그들이 결정한 그 새로운 존재의 기주(記注) 앞에서 ‘인간’은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가.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는 “뇌혈관(腦血管)이 조여오는 것 같은 불안에 휩싸이게 될 것이다." 이때는 영하 18도의 혹한기 겨울 시장통에 버려진 내 심장(心臟)과 같다.
그토록 그럴듯한 반듯한 삶을 살아가는 수많은 유명인조차 왜 번번이 이웃을 자신과 동등하게 존엄한 존재로 대하는 것에 이렇게까지 처참히 실패하는 것일까. 도대체 담담한 말투 아래 어떤 분노가 숨어 있기에 선망(羨望)의 대상인 유명인들의 이웃들은 인스타(Insta)시위에 나서고 있는 것일까. 필자의 견해로는 유명인 이웃과 대화를 통해 모두 자신의 오해라는 걸 알았지만, 비슷한 상황은 시간이 지나 얼마든지 또 일어날 수 있고, 무엇보다 대화 과정에서 느꼈던 감정을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오해이든 아니든 간에 중요한 시점은 이미 지난 것 같아서 유명인 이웃과 관계를 정리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그들의 열광적인 팬(fan)들이 두렵기는 하나 어쨌든 나와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으니까 후회는 안 할 것이다.
아무 대책 없이 반하고 오랫동안 빠져 허우적거리는 이미지 탓에 자꾸만 만들지 않아도 됐을 좋지 못한 인연인 악연(惡緣)을 괜히 만들어가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작금에 "어떤 이웃으로 기억되고 싶나"라는 질문에 '인성이 최고였던 이웃'이라는 평가를 듣고, 아이들에게 '실력도 중요하지만, 인성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며, "그는 이웃들과도 격의 없이 지낸다.”는 평판을 듣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인간은 매일 느끼는 감정의 종류는 지나치게 셀 수 없이 많다. 오래 분개(憤慨)하지 않기 위해선 곧 지나가버릴 감정과 내 자신을 동일시(同一視)하지 않는 연습이 필요하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분개한 감정은 누구나 퇴적암(堆積岩)처럼 쌓이게 된다. 현명한 언어든 어리석은 언어든 마지막이라는 시그널(signal)을 주기 시작하면 그걸 느낀 순간부터 마음 정리가 되지 않는다. 물론 상대는 그저 몰라서 소홀했던 게 다였다고 하지만, 이웃의 분개한 시그널(signal)이라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복면가왕의 음악 프로처럼 복면을 벗는 순간이 되는 것이다. 복면을 벗기 전에는 어떠한 대화도 할 수 없지만, 복면을 벗고 난 후에는 서로 편히 많은 대화를 하게 된다. 그러니까 ‘층간소음’의 해결책은 이웃의 복면을 스스로 벗도록 유도하는 즉, 충분히 많은 대화를 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도 ‘층간소음’을 주목하고 있다고 한다. ‘질병관리청’처럼 ‘층간소음 방지’청 설립이 필요한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일까. 학계 윗 분들에게 필자 이후의 연재 글을 부탁한다.